좋은 시

푸른 나무4

시인묵객 2009. 4. 24. 10:55


 

 

 

 

 

 

김용택의  시 세계


 

 

 

푸른 나무 4    /   김용택

 

 

 

 

우산 없이 학교 갔다 오다

소낙비 만남 여름날

네 그늘로 뛰어들어

네 몸에 내 몸을 기대고 서서

비 피할 때

저 꼭대기 푸른 잎사귀에서

제일 아래 잎까지

후둑후둑 떨어지는 큰 물방울들을 맞으며

나는 왠지 서러웠다

뿌연 빗줄기

적막한 들판

오도 가도 못하고 서서 바라보는 먼 산

느닷없는 저 소낙비

 

나는 혼자

외로움에

나는 혼자 슬픔에

나는 혼자

까닭없는 서러움에 복받쳤다

외로웠다

 

네 푸른 몸 아래 혼자 서서

그 수많은 가지와

수많은 잎사귀로

나를 달래주어도

나는 달래지지 않는

그 무엇을, 서러움을 그때 얻었다

그랬었다 나무야

오늘은 나도 없이

너 홀로 들판 가득 비맞는

푸르른 나무야.

 

 

 

 

 

푸른 나무 5

 

이제 너는 아무리 좋은

달밤에도 혼자 서 있다

사랑은 떠나고

달이 찾아와 달빛을 뿌리고

캄캄할 때 별들이 내려와 열리고

소쩍새가 날아와 울지만

붓꽃을 꺾어 들고, 들국을 꺾어 들고

네 그늘 아래로

발소리를 죽이며 숨죽여 그림자를 숨기던

첫 입맞춤을 하던 사랑은 이제 없다

누가 이제 네 아래 누워

긴 사랑을 약속하랴

들판 가득 환한 달빛이 쏟아지고

하얗게 열리던 길들은 적막하다

나무야

나도 사랑했던 나의 사람을

네 그늘 아래로 끌어들였었다.

달빛 새어들어 황홀하게 빛나던

그 수많은 이파리들의 수런거림을 들을

그런 눈부신

사랑은 이제 아무데도 없다

이 들판 가득했던

사랑과 이별을 다 알고

그 서러움까지 기대주고 감싸주던 나무야.

 

 

 

 

푸른 나무6

 

너는 언제나 홀로 서 있다

캄캄한 여름밤이나

뙤약볕 내려쬐는 여름 한낮이나

너는 이제 홀로 아득히 서 있다

네 그늘 아래 들어 논물을 보며

쉴 사람들은 없고

매미를 잡으러 너를 오를 아이들은 한 명도 없다

 

서너 동네 사람들이

네 그늘이 미어터지게 가득 모여들어

못밥을 먹곤 했었다

저 작은 들판 모내기가 다 끝나고

김매기가 다 끝나고

벼베기가 다 끝날 때까지

농부들은 네 그늘 아래 모여 쉬며 밥 먹고

네 그늘 아래 누워 낮잠 자고

밤이슬을 피하며 삽자루를 베고 누워

논물을 지키곤 했다

이 논 저 논 논물을 대며 싸우며 함께 늙어가던

사람들은 떠나고 죽어가고

남은 사람들도 이제 쓸쓸한 네 그늘 아래

들르지 않고 지나만 간다

 

네 그늘 가득

못밥을 먹는 모습들이

그 사람들이 지금도 네 그늘 아래 살아날 것만 같다

김이 뭉게 뭉게 피어나는

쌀 반 보리 반 반식기 고봉밥에

푸른 가닥김치, 생갈치 지진 것, 콩자반, 하지감자국

무엇이든 배가 터지게 먹고

네 그늘 아래 드러누워 보던 너의 그 푸른 이파리와

소낙비처럼 울어대건 매미소리와

달디달고 짧은 잠에서 깨어나던 그 여름 한낮의

눈부시던 들판의 햇빛

아, 꿈결처럼 들리던 모내던 소리도 이제 사라졌다

무엇이 남았느냐

이제 너는 언제나 홀로 서서

들판에 묻힌 옛 이야기를 쓸쓸히 더듬는다

너의 그 수많은 가지와 이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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