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의 시 세계
푸른 나무 4 / 김용택
우산 없이 학교 갔다 오다
소낙비 만남 여름날
네 그늘로 뛰어들어
네 몸에 내 몸을 기대고 서서
비 피할 때
저 꼭대기 푸른 잎사귀에서
제일 아래 잎까지
후둑후둑 떨어지는 큰 물방울들을 맞으며
나는 왠지 서러웠다
뿌연 빗줄기
적막한 들판
오도 가도 못하고 서서 바라보는 먼 산
느닷없는 저 소낙비
나는 혼자
외로움에
나는 혼자 슬픔에
나는 혼자
까닭없는 서러움에 복받쳤다
외로웠다
네 푸른 몸 아래 혼자 서서
그 수많은 가지와
수많은 잎사귀로
나를 달래주어도
나는 달래지지 않는
그 무엇을, 서러움을 그때 얻었다
그랬었다 나무야
오늘은 나도 없이
너 홀로 들판 가득 비맞는
푸르른 나무야.
푸른 나무 5
이제 너는 아무리 좋은
달밤에도 혼자 서 있다
사랑은 떠나고
달이 찾아와 달빛을 뿌리고
캄캄할 때 별들이 내려와 열리고
소쩍새가 날아와 울지만
붓꽃을 꺾어 들고, 들국을 꺾어 들고
네 그늘 아래로
발소리를 죽이며 숨죽여 그림자를 숨기던
첫 입맞춤을 하던 사랑은 이제 없다
누가 이제 네 아래 누워
긴 사랑을 약속하랴
들판 가득 환한 달빛이 쏟아지고
하얗게 열리던 길들은 적막하다
나무야
나도 사랑했던 나의 사람을
네 그늘 아래로 끌어들였었다.
달빛 새어들어 황홀하게 빛나던
그 수많은 이파리들의 수런거림을 들을
그런 눈부신
사랑은 이제 아무데도 없다
이 들판 가득했던
사랑과 이별을 다 알고
그 서러움까지 기대주고 감싸주던 나무야.
푸른 나무6
너는 언제나 홀로 서 있다
캄캄한 여름밤이나
뙤약볕 내려쬐는 여름 한낮이나
너는 이제 홀로 아득히 서 있다
네 그늘 아래 들어 논물을 보며
쉴 사람들은 없고
매미를 잡으러 너를 오를 아이들은 한 명도 없다
서너 동네 사람들이
네 그늘이 미어터지게 가득 모여들어
못밥을 먹곤 했었다
저 작은 들판 모내기가 다 끝나고
김매기가 다 끝나고
벼베기가 다 끝날 때까지
농부들은 네 그늘 아래 모여 쉬며 밥 먹고
네 그늘 아래 누워 낮잠 자고
밤이슬을 피하며 삽자루를 베고 누워
논물을 지키곤 했다
이 논 저 논 논물을 대며 싸우며 함께 늙어가던
사람들은 떠나고 죽어가고
남은 사람들도 이제 쓸쓸한 네 그늘 아래
들르지 않고 지나만 간다
네 그늘 가득
못밥을 먹는 모습들이
그 사람들이 지금도 네 그늘 아래 살아날 것만 같다
김이 뭉게 뭉게 피어나는
쌀 반 보리 반 반식기 고봉밥에
푸른 가닥김치, 생갈치 지진 것, 콩자반, 하지감자국
무엇이든 배가 터지게 먹고
네 그늘 아래 드러누워 보던 너의 그 푸른 이파리와
소낙비처럼 울어대건 매미소리와
달디달고 짧은 잠에서 깨어나던 그 여름 한낮의
눈부시던 들판의 햇빛
아, 꿈결처럼 들리던 모내던 소리도 이제 사라졌다
무엇이 남았느냐
이제 너는 언제나 홀로 서서
들판에 묻힌 옛 이야기를 쓸쓸히 더듬는다
너의 그 수많은 가지와 이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