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 원재훈

시인묵객 2015. 9. 9. 08:00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원재훈

 

 

한때 나는 편지에 모든 생을 담았다.

새가 날개를 가지듯

꽃이 향기를 품고 살아가듯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별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 생의 비밀을 적었다.

 

아이의 미소를, 여인의 체취를, 여행에 깨우침을,

우체통은 간이역이었다.

삶의 열차가 열정으로 출발한다.

나의 편지를 싣고 가는 작은 역이었다.

 

그래 그런 날들이 분명 있었다.

 

낙엽에 놀라 하늘을 본 어느 날이었다.

찬바람 몰려왔다 갑자기 거친 바람에

창문이 열리듯, 낙엽은 하늘을 듬성듬성 비어 놓았다.

그것은 상처였다.

언제부턴가 내 삶의 간이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아

종착역이 되었다.

 

모두들 바삐 서둘러 떠나고 있다.

나의 우체통에는 낙엽만 쌓여 가고

하늘은 상처투성이의 어둠이었다.

밤엔 별들이 애써 하늘의 아픔을 가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나의 텅 빈 주머니에는

그대에게 보낼 편지가 없다.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가고 있는데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주소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마음을 볼 수가 없다.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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