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둥글기 때문

시인묵객 2012. 12. 21. 19:30

 

 

 

 

둥글기 때문 / 김지하

 

 

거리에서

아이들 공놀이에 갑자기 뛰어들어

손으로 마구 공 주무르는 건

철부지여서가 아니야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골동상 유리창 느닷없이 깨뜨리고

옛 항아리 미친 듯 쓰다듬는 건

훔치려는 게 아니야

 

이것 봐, 자넨 몰라서 그래

거리에서

노점상 좌판 위에 수북 수북히 쌓아 놓은

사과 알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건

 

아니야

먹고 싶어서가 아니야

돈이 없어서가 아니야

 

모난 것, 모난 것에만 싸여 살아

둥근 데 허천이 난 내 눈에 그저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좁은 바지 차림 아가씨

뒷모습에 불현듯 걸음 바빠지는 건

 

 

맵시 좋아서가 아니야

반해서도 아니야

천만의 말씀

색골이어서는 더욱 절대 아니야

둥글기 때문

 

불룩한 젖가슴 도톰한 입술

새빨간 젖꼭지나 새빨간 연지

그 때문도 아니야

 

뚫어져라 끝내 마주 쳐다보는 건

모두 다 그건

딱딱한 데, 뾰족한 데 얻어맞고 찔려 산 내겐

환장하게 보드랍고 미치고 초치게

둥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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