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기 때문 / 김지하
거리에서
아이들 공놀이에 갑자기 뛰어들어
손으로 마구 공 주무르는 건
철부지여서가 아니야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골동상 유리창 느닷없이 깨뜨리고
옛 항아리 미친 듯 쓰다듬는 건
훔치려는 게 아니야
이것 봐, 자넨 몰라서 그래
거리에서
노점상 좌판 위에 수북 수북히 쌓아 놓은
사과 알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건
아니야
먹고 싶어서가 아니야
돈이 없어서가 아니야
모난 것, 모난 것에만 싸여 살아
둥근 데 허천이 난 내 눈에 그저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좁은 바지 차림 아가씨
뒷모습에 불현듯 걸음 바빠지는 건
맵시 좋아서가 아니야
반해서도 아니야
천만의 말씀
색골이어서는 더욱 절대 아니야
둥글기 때문
불룩한 젖가슴 도톰한 입술
새빨간 젖꼭지나 새빨간 연지
그 때문도 아니야
뚫어져라 끝내 마주 쳐다보는 건
모두 다 그건
딱딱한 데, 뾰족한 데 얻어맞고 찔려 산 내겐
환장하게 보드랍고 미치고 초치게
둥글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