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시인은 모름지기

시인묵객 2012. 12. 19. 19:30

 

 

시인은 모름지기 / 김 남 주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 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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