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못 위의 잠

시인묵객 2012. 8. 19. 19:30

제비와 제비집

 

 

 

 

못 위의 잠  /  나 희 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도 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나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고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새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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