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수선화

시인묵객 2012. 8. 15. 19:30

 

 

 

 

수선화   / 유 치 환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의 아침 거칠은 내 심사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웅크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한 대기 속에 봄 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의 깊은 동통을 가만히 견디고 호을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위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여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코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었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온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쟎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한 경건한 손일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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