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타오르는 책

시인묵객 2012. 8. 14. 19:30

 

 

 

 

타오르는 책 / 남 진 우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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