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시집 읽는 어머니

시인묵객 2012. 5. 6. 19:30

 

 

 

 

 

 

 

 

시집 읽는 어머니 / 안정환

 

 

 

아들 공부 잘 했으면 됐지

어미 글 모르는 게 무슨 흉이노

노인대학 가서도 늘 큰소리치는

문맹이신 우리 어머니

한글은 몰라도 시내버스 타시다

용케 아라비아 숫자는 익히셨다

 

어설픈 내 시집 나오는 날

먼저 한 권 드렸더니

책 표지판 한참 들여다 보신다

출판사 시집 순번 '15'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정색하신다

니 책에다 우리 동네서 증심사 가는

시내버스 15번을 왜 써 놨노

 

그날 종일 화두 하나 떠나질 않는다

어쩌면 내 시집이 단 하루라도

시내버스 15번이 될 수 있을까

도시 끝에서 끝까지 되풀이 오가며

승차권 하나에 사람들 편하게 나를 수 있을까

 

러시아워에 급한 인생길 막혀도

가만히 두 눈 감고 몽상하게 할 수 있을까

저녁이나 주말이면 한 사람이라도 더

시끄럽고 먼지투성이인 시장에서 꺼내어

조용한 산사 아래로 데려다 줄 수 있을까

 

이런 물음들 몰두하다 문득

우리 어머니 이미 어설픈 내 시집

다 읽으신 게 틀림없다 생각한다

15번 시내버스라니 가당찮다는 듯한

얼굴 표정 조심스레 살피며

불쑥, 엉뚱한 한 말씀 드린다

어머니, 시내버스 한대 사드릴까요?

 

 

- 시문학 2004년 1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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