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사는 이유

시인묵객 2011. 9. 30. 21:23

 

 

 

 

 

 

 

사는 이유 / 최 영 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 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 해 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 해 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마주 불러볼 정다운 이름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섰다.

 

갓 추수를 해들인 허허한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긴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 온 이 한 철

삶의 백가지 간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음이라

 

눈멀듯 보고지운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한개 그리움의 벌이여

이 타는 듯한 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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