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추수(秋收) / 허 윤 영
가을바람 앞세우며
종일 억새밭을 뒤적이던 햇살이
사립문 지나 방문 돌쩌귀를 비틀며
가부좌를 틀자
등 떠밀려 앞마당에 내려앉은 낙엽은
발갛게 서산에 먼저 달아올라
군불을 지피고 있었다
포근해질 겨를도 없는 들녘이
그때서야 가을걷이 한답시고
막걸리 주발에다
손가락으로 저어 벌컥벌컥 마신 뒤
마당에 낙엽을 쓸어 모아
허기진 아궁이에 배를 채워주고
방안에 잠든 햇살 달래
또 내일 들녘으로 가시는 것 이었다
사무실 주위를 맴돌던 햇살이
막 창문을 내리고 있다
모니터에 볏단처럼 남아
딸꾹질을 멈추지 않는 파일들
들녘으로 가신
내 아버지의 추수(秋收)가
몹시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