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가는 봄/ 김규련
아파트 현관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겨우내 속살을 드러내고 떨고 있었다.
그 동안 냉기를 씻어내는 비가 몇 차례나 쏟아져 내렸던가.
어느새 좁쌀 같은 겨울눈(冬芽)이 탁 틔어서 노란 꽃으로 주렁주렁 달려있다.
이 산수유나무가 해마다 가장 먼저 나에게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려 준다고 할까.
나는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어슬렁거리며 뜨락을 둘러본다.
기온 변덕 때문일까. 여기저기 자목련이며 진달래며 개나리… 등
이른 봄꽃들이 동시에 피어나 저마다 예쁜 자태를 겨루고 있다.
뒤란으로 나가 정원을 거닐어 본다. 은행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
낙엽수들이 푸른 잎새를 힘차게 밖으로 내밀고 있지 않는가.
양지바른 땅에는 둑새풀, 고추풀, 냉이, 쑥… 등 잡초들이 초록빛을 깔고 있다.
텃새들은 연방 나무 사이를 분주하게 날아다니며 옥구슬을 뿌리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걸쳐 둔 거미줄에 애벌레 두 마리가 잡혀 있다.
거미는 보이지 않는다.
살려고 꿈틀거리는 것을 못 본 척 지나친다.
벌 나비는 활동하기에 아직 이른 것일까.
어린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뜰에 나와 놀고 있다. 까치와 비둘기도 노닐고 있다.
아이들이 다가오자 까치는 껑충껑충 뛰다가 훌쩍 날아간다.
비둘기는 뒤뚱뒤뚱 걷다가 후다닥 나무에 날아오른다.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엔 새 희망이 담겨 있는 듯 보인다.
간밤에 비를 내렸던 하늘이 오늘은 맑고 푸르다.
따뜻한 햇볕과 산뜻한 공기, 꽃과 향기와 푸른 잎새들의 향연.
아름답고 찬란하고 황홀한 봄을 팔순의 어귀에서 또 맞게 된 감격.
문득 천지의 사방에 대고 머리 숙여 절을 하고 싶다.
나는 근년에 와서 봄이면 자연의 기운을 어떻게 좀 받아들여
감기를 떨쳐내고 건강할 수 있을까 궁리해보곤 한다.
햇볕의 온기, 봄비의 생기, 흙의 덕기,
잡초의 활기, 잎새의 온기, 꽃의 향기, 바람의 화기…
등을 온몸으로 향유하고 싶어 욕심을 부린다.
하나 부질없는 범부의 백일몽이었다고 할까.
마음의 호숫가를 서성이다가 호심에 일렁이는 나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벗어 던졌다 싶으면 또 새롭게 걸치게 된 온갖 장식의 누더기.
장식의 근원에는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심이 숨어 있었다.
실오라기 한 가닥의 위선도 없을 때 자연의 기는 스스로 스며드는 것을.
늙어가면서 생존의 본능에 합당한 최소한의 욕심을 남겨 두고
죄다 버려야 함을 이 봄에 다시 되뇌어본다.
노역의 횡포가 자신의 파멸은 물론,
선량한 이웃까지 비극의 나락으로 몰아넣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저만치 이웃해 서 있는 학산이 오늘따라 나에게 손짓을 한다.
발걸음을 옮겨 산으로 향한다.
소나무 숲에선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며 노랫소리가
산새들의 지저귐과 섞여서 이리저리 떠다닌다.
너도밤나무들은 연푸른 잎새를 반짝이며 햇빛을 받고 섰다.
봄 산은 노래 부르고 여름 산은 춤추고 가을 산은
그림 그리고 겨울 산은 명상에 잠긴다고 할까.
나뭇가지에서 날다람쥐 한 마리가 나를 보고 놀란 듯
눈알을 굴리다가 멀리 도망쳐 버린다.
작은 짐승이 덩치 큰 동물을 만나면 피해 가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겠지만, 사람은 더욱 무서운 모양이다.
어쩌면 자연 속에서 가장 영악하고 잔인한 괴물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천사의 손길이 있는가 하면 악마의 이빨도 있다.
자연에는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다.
자연은 이 생명체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해 두고 있지 않는가.
함이 없으면서 하지 아니함이 없이 생명체의 종(種)에
천적을 만들어 세력의 균형을 잡아준다.
모든 존재를 꾸준히 변화시켜서 태어남과 소멸을 주관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창조주나 조물주나 초월자는 바로 자연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종교에 따라 경외하고 순종하며 신앙하는
신을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범천왕, 옥황상제, 하늘…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연의 동의어요 대명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온다.
어쩌면 천당과 극락도 자연 속에 있고 연옥과 지옥도 자연 속에 있으리라.
마침내 각자의 마음속에 있지 않을까. 자연 속에 있는 만물은,
그것이 소똥이든 말 눈곱이든 티끌이든
모두가 소중하고 의미 있고 그 자체로 진리이리라.
오늘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온갖 핑계로 자연을 더럽히며 부수며 죽이고 있다.
인간의 문명 열차는 마침내 종말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고서도 풍요롭고 안락하고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하리라.
깊은 오뇌와 고민으로 하늘과 땅이 함몰하는
죽음의 부메랑을 피해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한 줄기 산바람이 나무숲을 흔들고 지나간다.
아기의 살 냄새 같은 향기가 코 끝에 와 닿는다.
흐뭇한 충만감이 가슴에 차오른다고 할까. 뭇 생명의 어머니요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인 자연의 사랑에 감동해서일까. 눈시울이 젖어온다.
이 순간에도 자연은 봄의 풍광을 줄줄이 거느리고 떠나가고 있다.
변심한 연인이 나를 남겨 두고 가듯이,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시는 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것이다.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고 낡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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