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여, 정착하지 마라 / 서숙
어젯밤에는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잠결에도 행복했는데,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아침에 잠에서 깨니 바다가 한눈에 가득하다.
아직도 꿈속인 듯, 꿈처럼 아름다운 정경이다.
내일 눈을 뜨면 내 앞에 바다가 펼쳐지리라.
캄캄한 창문 앞에서 예상했지만 기대보다 더, 이 너른 바다에 나의 가슴이 벅차다.
여름의 끝자락, 인적 끊긴 바닷가에 내려서서
소금물에 씻긴 조개껍데기들이 흰모래와 뒹구는 해변을 걷는다.
발바닥이 기분 좋게 따끔거린다. 험한 산세에 곧장 닿아 있는 바다는
수심에 따라 짙은 청색, 청록색, 에메랄드빛으로 흔들리고,
모래사장 가까이는 깨끗한 옥빛이다. 깊고 그윽하지만 차갑고 쌀쌀하여
안타까움을 안겨주는 애인 같은 바다를 오랫동안 탐한다.
수면에 솟아있는 울퉁불퉁한 크고 작은 바위는 내달리던
육지의 끄트머리 미련같다. 파도가 높다.
가파른 해안을 배경으로 바위를 때리는 정경은
흰 포말이 흩어지는 모습 때문에 늘 구도자의 몸짓이다.
어떤 때는 무한히 포용하는 듯, 어느 때는 완강히 거부하는 듯,
오로지 묵묵하게 버티는 바위를 향해
풀길 없는 갈망을 담고 파도는 헛되이 구하고 또 구한다.
늘 가슴 저린 막막함을 가져다주는 아득한 수평선. 떠도는 일엽편주가 애처로운 건,
피안이 저기에 있다고 하는, 닿을 수 없는 곳에의 동경이 너무 허망하여서일 게다.
동해안 작은 포구를 지나니 정동이다. 철로와 바다.
사람들은 이들 곁에만 서면 언제나 ‘여행을 떠나세요.’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이곳에서는 아예 철길과 해안선은 나란히 자리를 함께하면서 인간들을 한층 더 부추긴다.
그렇지만 이렇게 강렬한 유혹 앞에서도 우리는 또 머뭇거린다.
매양 한사코 홀로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반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대화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인간의 품을 그리워하는 우리. 인연의 고리로부터 훌훌 벗어나고 싶어하는 한편,
펼쳐내지 못한 집착에 연연하여 한없이 전전긍긍하는 우리.
그래서 행복 혹은 안식은 오로지 꿈일 뿐 인간의 경지는 아니다.
멀리서 보면 해안선이 고운 해변도 가까이에서는 격정이 눈부시다.
문득 안락함에 길들어진 마음속 고이 접어두었던 깃발 하나가 펄럭인다.
파도는 해일이 덮치지 않는 한 해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지만,
파도는 파도마다 같은 것은 하나도 없이 자유분방하다.
‘삶은 그 형식에 있어 절제와 절도를 미덕으로 하고 살아라.
그러나 삶의 내용 즉 정신은 안주하지 말고
마음껏 자유롭게 비상하라’고 바다는 내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마음이여, 정착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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