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언의 바다 / 곽재구
저문 시간이면 순천만에 나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개펄이 좋고 개펄 냄새를 이리저리 실고 다니는 바람의 흔적이 좋다.
키 넘게 훌쩍 자란 갈대숲. 갈대들의 목은 꺾여져 있다. 모두 같은 방향이다.
바람은 가끔씩 갈대숲 사이로 들어온다.
그럴 때 갈대들은 자신의 내면 안에 숨긴 낡고 오래 된 악기의 소리를 낸다.
어디로 갈까... 고개를 숙이고 끝없이 걸어가는 갈대들의 행렬은 순례자의 그것을 닮아 있다.
바람은 순례자의 옷깃을 흔들고, 일찍 도착한 철새 몇 마리가 순례자의 이마를 선회한다.
시베리아로부터의 비행을 거친 그들의 날갯짓은 은빛으로 빛난다.
조류학자들이 먹이를 위해 혹은 번식을 위해 새들은
먼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때, 나는 고개를 젓는다.
어쩌면 더 형이상학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당신 같으면 단지 부족한 식량 때문에
먼 산과 강을 넘어 수천 수만리의 여행을 하겠는가.
그것도 눈앞에 닥친 기아가 아닌 얼마 후의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를 위한 시간, 미래를 위한 비행, 거기에는 일정부분 짙은 꿈의 냄새가 배어 있다.
오랜 세월동안 새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맞 바꿀만한 가혹한 비행을 통해
스스로의 유전자 내부에 꿈에 대한 기록들을 저장하고,
그 추억들은 쌓이고 쌓여 설령 지금보다 가혹한 삶의 현실이
지상에 도달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해 낼 힘을 갖추는 것이다.
가혹한 자연의 재앙에 부딪쳤을 때 인간이 저 새들보다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순간, 새 한 마리가 ‘끼룩’하는 울음소리 하나를 떨군다.
그 울음소리로 사방은 더욱 고요해진다.
나는 갈대밭과 개펄이 만나는 맨 끝 지점까지 걸어 들어간다.
해는 다 졌지만 해의 숨결은 여전히 짙다. 하늘에는 노을이 장관이다.
모르는 사람은 서편 하늘에만 노을이 빛어질 거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동쪽과 남쪽, 북쪽 하늘 모두 노을이 진다.
형형색색의 노을을 보고 있노라면 그 섭리의 이면이 문득 궁금해진다.
그러나 순천만의 노을이 하늘만 다 채운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단견이다.
노을은 땅 위에도 진다. 땅, 정확히 표현하자면 개펄이다.
개펄 위에는 썰물들이 남기고 간 작은 웅덩이들이 남아 있다.
그 웅덩이 위에 노을이 살아 뜨는 것이다.
처음 그 노을을 보았을 때 나는 개펄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두 손 가득 웅덩이의 물을 담았다.
함께 모은 내 손바닥 안에서도 노을이 떴다.
세상의 모든 보석들의 광휘를 용해한 것 같은 그 빛….
나는 그 빛의 섭리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노을빛이 다 스러지고 난 뒤 갈대밭은 어둠에 잠긴다.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진 뒤의 저녁 어둠은 부드럽다.
자세히 보면 푸르스름한 쪽빛의 기운이 어둠속에 흐른다.
작은 파도도, 새들의 날갯짓도 길대 들의 꺽인 목도 다 보이지.
이 신비하고 고요한 어둠의 시간이 나는 좋다. 단순한 어둠이 아닌 낮 동안
이 개펄과 바다위의 꿈을 부린 많은 생명체들의 영상이 그 어둠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멍하니 어둠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나는 피식 웃는다.
몇 줄의 시를 생각하고 있는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시 쓰는 일 한가지 뿐 이었다
남들이 다들 감동하는 좋은 시들을 쓴 것도 아니지만 못생기고
허름한 그 시들을 쓰는 시간들이 내겐 행복의 시간이었다.
이곳 바다에서 만난 철새들의 먼 비행, 내 시 쓰기가 그런 비행의 흔적을
조금씩 닮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부끄러웠다.
요즘 나는 시를 쓰지 못한다. 어디선가 날개가 꺾였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어디선가…. 나는 그 장소를 알고 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 날개는 내 숨은 의자에 의해서 꺾여진 것이다.
삶을 위해 삶이 가장 소중한 빛을 지워버린 것이다. 바라볼수록 쓸쓸한 그 빛.
이럴 때 순천만의 하늘 위에는 무수한 별빛이 빛난다.
과거를 회상하는 버릇은 가슴 안에 깊은 말뚝을 지닌 모든 슬픈 짐승들의 운명 같은 것이다.
줄에 매달린 염소처럼 그들은 말뚝에 매인 밧줄 바깥의 세상으로서는 나갈 수 없다.
시 쓰기에 빠져들던 문학청년 시절, 내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름씩 한 달씩 지낸 시간들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새 달쯤 말을 않고 지낸 적이 있다.
내 몸 안의 가장 든든한 기둥 위에 ‘묵언’이라는 패찰을 드리워놓고 세상을 바라보던 시간들.
온전히 내 자신을 위해서만 열려져있던 시간들. 타인의 꿈과 욕망에
아무런 방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나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들어 갔던 시간들.
한없이 고요했던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나의 시들이 천천히 날개 짓하는 것을 보았고 가능한 그 날개 짓이 더욱 격렬해지기를.
세상에 대한 더 깊은 연민과 지혜와 열정을 지니기를 나는 바랐다.
그리하여 내 시가 어떤 사랑스럽고 순정한 사랑의 광기의 언덕에 이르러 고단한 날개 짓을 멈추기를.
그곳에서 여유롭게 비행하며 새로운 언덕을 다시 꿈꾸길 바랐던 것이다.
그 무렵의 나의 침묵은 날개의 다른 이름이었다.
불빛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저 불빛은 화포의 불빛이고, 저 불빛은 거차의 불빛이며,
저 불빛은 와온 마을의 불빛이다. 하늘의 별과 순천만 갯마을의 불빛들을 차례로 바라보며
나는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하는 싱거운 생각에도 잠겨본다.
당신 같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나의 선택은 마을의 불빛들이다.
불빛은 갓 핀 다알리아 꽃송이처럼 싱싱하다. 세 칸 집 안에 사는 사람들이,
꿈과 노동과 상처와 고통의 시간들의 은유이기도 하다. 아름다움보다는 쓸쓸함이,
기쁨보다는 아쉬움의 시간들이 훨씬 많았을 텐데도 그들은 말없이 불을 켜고
지상의 시간들을 지킨다. 어떤 불빛들은 밤을 새우기도 한다.
그럴 때 마을의 짐들은 자신의 내면 안에 형형색색의 등을 켜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샤갈의 그림에 나오는 꿈, 염소와 새들과 초승달과 어린 남매와
할머니가 함께 날개를 달고 초록빛 어둠속으로 날아오르는 꿈.
운동회 날 풍선처럼 두둥실 날아오르는 그 집들을 보며 나는 박수를 친다.
그리고는 날이 선 낫으로 그 집들에 매달린 끈을 하나씩 끊어버린다.
훨훨 날아가렴. 또 다른 어딘가에 마을을 이루고 새로운 꿈을 꾸렴.
그래. 나도 언젠가 그 마을에 이르러 새로운 날들의 시를 쓸테니….
사방은 고요하다. 나는 갈대 숲 사이를 걸어 다시 내가 사는 도시 속으로 걸어온다.
그럴 때 나는 종종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듣는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음으로써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
침묵함으로써 모든 욕망과 영혼의 본질 속으로 여행할 수 있는 시간들.
나는 내 꺾인 날개를 소중하게 바라본다. 고요하게 살아 있는 순천만의 모든 생물들,
그들의 꿈, 삶의 지혜들…. 스무 살 적, 시에 젖어들던 침묵의 시간들 속으로
나는 다시 설움을 옮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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