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 이해인

시인묵객 2016. 8. 27. 08:00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 이해인 ( 수녀 시인, 1945-)

 

1

처음으로 사랑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하늘색 원피스의 언니처럼 다정한 웃음을 파도치고 있었네.

더 커서 슬픔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실연당한 오빠처럼 시퍼런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네.

어느 날 이별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남빛 치마폭의 엄마처럼 너그러운 가슴을 열어 주었네.

그리고 마침내 기도를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파도를 튕기는 은어처럼 펄펄 살아 뛰는

하느님 얼굴이었네  

 

2

이렇게 후련할 수 있을까

마음에 붙은 불을 물 같은 마음으로 꺼 버리고

바다에 나갔을 때 바다는 내가 감추어 둔

슬픔마저 눈치 채고 가라 앉혔네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아 나와 함께

답답했던 바다여 이제 욕심을 버리려 바다에 왔을 때 처음으로

내 안에 출렁이는 자유의 바다여

 

3

바다에 와서 빈 배를 보면 왜 이리 기쁜가

빈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음은 얼마나한 아름다움인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 굽은 마음을 곧게 흰 모래를 밟으며

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손에 쥔 몇 개의 조가비가 푸른 음성으로 읊어 대는 바다의 詩

해초를 캐듯 시를 캐는

해녀이고 싶어 썰물 때의 바닷가에서

 

4

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가슴이 열린 바다

그는 가진 게 많아도 뽐내지 않는다

줄 게 많아도 우쭐대지 않는다

 

5

답답한 마음 바다에 내려놓고 탁 트인 마음 들고 온다

가득 찬 욕심 바다에 벗어 놓고 빈 마음 들고 온다

 

6

숨은 보물을 찾듯 모래밭에 묻힌 조개껍질들을 줍는다

파도에 씻긴 조그맣고 단단한 그 얼굴들은

바다가 낳은 아이들 태어날 적부터

섬세한 빛깔의 무늬 고운 옷을 입고 있다

하얀 모래밭에 모래알 웃음을 쏟아 내고 있다

 

7

저녁 바다에서 내가 바치는 바다 빛 기도는

속으로 가만히 당신을 부르는 것

바람 속에 조용히 웃어 보는 것

바다를 떠나서도 바다처럼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

 

8

바다는 온몸으로 시를 읊는 나의 선생님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어느 날은 거칠게

어느 날은 부드럽게 가끔은 내가 알아듣지 못해도

멈추지 않고 시를 읊는 푸른 목소리의 선생님

 

9

바다는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나의 선생님

때로는 푸른빛 때로는 남빛 어느 날은 회색빛

어느 날은 검 푸른빛 가끔은 내가 알아보지 못해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림을 쉬지 않고 그리는 아름다운 선생님

 

10

바다에 가지 않아도 항상 내 안에는 바다가 출렁이네

눈을 들면 수평선 파도로 뛰는 마음

늘 푸르게 살라 한다

물새로 깃을 치는 마음 늘 기쁘게 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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