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
너무 좋아할 것도 너무 싫어할 것도 없다.
너무 좋아해도 괴롭고, 너무 미워해도 괴롭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고,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 가지 분별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는 괴로움도 젊음을 좋아하는데서 오고,
병의 괴로움도 건강을 좋아하는데서 오며,
죽음 또한 삶을 좋아함...즉 살고자 하는 집착에서 오고,
사랑의 아픔도 사람을 좋아하는데서 오고,
가난의 괴로움도 부유함을 좋아하는데서 오고...
이렇듯 모든 괴로움은 좋고 싫은 두 가지 분별로 인해 온다.
좋고 싫은 것만 없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마음은 고요한 평화에 이른다.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그냥 돌처럼 무감각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을 하되 집착이 없어야 하고,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마음이 그 곳에 딱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 때부터 분별의 괴로움은 시작된다.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한다.
인연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
- 법정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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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釋迦誕辰日)
석가가 탄생한 날. 초파일(初八日)이라고도 한다.
BC 563년 4월 8일(음력) 해뜰 무렵 북인도 카필라 왕국(지금의 네팔 지방)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와 마야(Maya)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經)과 논(論)에 석가가 태어난 날을 2월 8일 또는 4월 8일로 적고 있으나,
자월(子月:지금의 음력 11월)을 정월로 치던 때의 4월 8일은
곧 인월(寅月:지금의 정월)을 정월로 치는 2월 8일이므로 음력 2월 8일이 맞다고 하겠다.
한국에서는 음력 4월 초파일을 석가탄신일로 보고 기념한다.
[석가 (釋迦/BC 563 ?~BC 483 ?)]
불교의 개조. 석가모니(釋迦牟尼)·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默)으로 번역된다. 보통 석존(釋尊)·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Sakya)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muni)는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o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agata),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출생】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山)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迦毘羅城)을 중심으로 샤키야족[釋迦族]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淨飯王)와 마야(Maya:摩耶)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키야족은, 그 왕호가 정반왕, 그리고 정반왕의 동생이 백반(白飯)·감로반(甘露飯) 등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 미작(米作) 농경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는 크샤트리야 계급출신이라고 하지만, 샤키야족 내부에 카스트의 구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가 순수한 아리아인(人)이라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네팔계(系) 민족에 속하는 종족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압도적인 아리아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의 습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석가를 낳았다. 이는 아소카왕[阿育王]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이 곳에 세운 석주(石柱)가, 1896년에 발견·해독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와 왕자의 상호(相好)를 보고, “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하면 반드시 불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의 생몰연대에 관하여는 이설(異說)이 많으나, 그 중 유력한 것은 스리랑카의 《도사(島史) Dipavamsa》 《대사(大史) Mahavamsa》에 근거하여 불교학자 W.가이거가 주장한 BC 563∼BC 483년 설이다.
이 설은 중국의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에 전하는 중성점기(衆聖點記), 즉 불멸(不滅) 후 최초의 율장(律藏)이 결집되었을 때 제1점을 치기 시작하여 매년 1점씩 쳐서, 제(齊)나라의 영명(永明) 7년(AD 490)까지 975점에 이르렀으므로 불멸이 BC 485년이라는 설(BC 565∼BC 485년)과도 대략 일치된다. 그 외에 BC 624∼BC 544년설, BC 463∼BC 383년설 등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전자를 채용하고 있다.
유래
이 날은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라 하여 불탄일(佛誕日) 또는 욕불일(浴佛日)이라고도 하나,
민간 에서는 흔히 초파일이라고 한다.
석가의 탄생일이기 때문에 원래는 불가(佛家)에서 하던 축의행사 (祝儀行事)였으나 불교가 민중 속에 전파됨에 따라서 불교 의식도 차츰 민속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신라는 여러가지 불교 행사가 성했는데,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이 불교를 호국(護國)의 바탕으로 참여시키는 정책을 유지하면서 불교행사는 이전부터 전해오던 세시행사와 더불어 자연스 럽게 병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의 팔관회(八關會)는 불교행사가 신라의 세시풍속으로 승화된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월 초파일은 불도의 행사가 신라의 호국불교로 승화된 이래 후삼국을 거쳐서 고려조에 이르는 동안 우리의 민속과 동화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와 고구려 본기에는 불도의 행사가 세시의 행사로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신라본기에서는 석가모니 탄생일을 팔관회로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고려사 (高麗史)》에 따르면, 왕성(王城)에서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정월 대보름에는 14일, 15일 이틀간 을 저녁에는 연등(燃燈)을 하던 풍속이 있었으나 최이(崔怡)가 4월 8일로 옮겨서 하게 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사월 초파일은, 불교의 축의행사로 전래되었다가 민간의 세시풍속과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신라의 팔관회, 고려의 연등회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정착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석가탄신일은 불교의 연중 기념일 가운데 가장 큰 명절로 연등(燃燈), 관등(觀燈)놀이(제등행렬)· 방생(放生), 물놀이, 성불도놀이, 탑돌이 등을 한다.
우리나라는 1975년 1월 15일 '부처님 오신 날(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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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
등을 다는 이유는 어두운 세계를 밝게 비춰주는 부처님의 공덕을 칭송하고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자 등을 밝히는 연등 공양에 대해서 불교 경전에서는 지혜, 해탈, 자비, 선행, 제생
등을 의미하고 있다고 전한다.
연등(燃燈)은 등불을 밝힌다는 말로 부처님께 공양하는 방법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로 가득찬 어두운 세계(無明)를 밝게 비춰주는 부처님의 공덕을 칭송하고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자 등(燈)에 불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현우경>에서는 "왕과 귀족들이 밝힌 호화로운 등불은 모두 꺼졌으나 가난하나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 여인 난타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였고,
<불설시등공덕경>에는 "삼명의 복전을 구하기 위하여 탑묘 제불 앞에 등불을 밝히면
도리천에 다시 태어나며 다섯가지 청정을 얻을 수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등불
하나하나가 수미산과 같고 등유는 넓은 바다와 같으므로 불가에서 시행하는 모든 공양구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된다고 하였다.
신라 진흥왕 때 팔관회란 행사가 있었는데, 팔관회란 마음을 맑게하는 불교의식인 팔관재계
(불자가 하루 밤, 하루 낮 동안 받아 지니는 계율)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토속신앙과 어우러져
가을 추수에 대한 감사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한편, 가무백회를 즐기는 국민축제 성격이 강했다.
팔관회가 시작되기 전 날에는 왕이 직접 법회에 참가하고, 궁중에서는 외국 사신까지 불러 함께
즐겼으며 온 백성들도 사흘씩 휴가를 받아 마음껏 즐겼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까지 연등회와 함께 국가의 2대 주요행사로 꼽힐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던 팔관회는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에 눌려 사라졌다. 이처럼 공식적으로 팔관회라는 행사가 있기 이전부터
같은 민족적 의미의 연등의식이 공존하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연등행사는 신라에서 '간등'
또는 '관등'이란 이름으로 행해졌다.
진흥왕 12년(551년)에 전사한 사졸(士卒)을 위하여 7일 동안 행해졌고, 경문왕 6년(866년)에는
정월 보름날에 황룡사에서 연등행사가 있어 왕이 친히 이 행사에 참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
외에도 다수의 기록이 있어 신라시대 이래로 국가 차원에서 열려왔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전통의례와 습합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성대히 국가적 종교놀이 문화로
발전하여 그 절정을 이루었는데 '춘연등 돌팔관'이라 하여 연등도감과 팔관보라는 행사 주관
기구를 주고 국가에서 직접 재원을 조달하고 주관하는 국가적 행사로 발전하였다. 추수를 마친
11월 15일에는 팔관회를, 새봄을 맞이하는 2월 15일에는 풍년을 기원하면서 연등회를 개최하여
온 백성에게 잔치를 베풀고 가무를 즐겼던 것이다.
이는 연등회가 국왕과 귀족만의 행사가 아니라 일반화된 풍속으로 온 백성의 국가적, 민속적
종교축제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2월에 행하던 연등행사는 의종 때부터 정월 보름에 행하게 되
었고, 공민왕 때에 와서는 4월 8일에 행하게 되었다. 연등하는 풍속이 사월 초파일 석가모니가
탄생한 날을 경축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에서 등놀이행사를 벌였다. 이규보가 지은
<봉은사연등도량문>에 의하면 "봄철의 좋은 밤을 가리어 법석을 절에서 베푸니, 천만 개의
아름다운 등불이 찬란하기가 광명의 바다 같고, 백 가지 진귀한 음식은 풍성한 공야의 구름을
일으킨 듯하다"고 묘사되어 있는 바 그 성대하고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수많은 등을 매달아서 마치 등산(燈山)을 연상케 할 정도였으며, 이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진 등불로 인하여 늘어진 행렬이 마치 불꽃바다를 연상하게
하였다고 한다. 숭유억불정책을 편 조선시대에는 종교행사로서의 연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초파일 등 밝히기는 계속되어왔다. 밤에 통행금지가 있었지만 초파일 만은 통금이
해제되었을 정도로 사월 연등은 민간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연등행사 때는 낙화,줄불,호기
(등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이 장대를 메고 떼를 지어 소리치며 동네를 다니며 쌀을 구하던 풍습)
,수부희(동이에 물을 담아 바가지를 엎어놓고 돌아가면서 두드리던 놀이), 영등, 그림자 인형놀이
등 등과 관련된 놀이를 함께 하였다. 연등과 관련된 기록은 19세기 중엽의 <동국세시기>를 통해
비교적 소상히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 4월 8월 풍속에는 이 날 등불을 켜므로 등석이라 한다.
며칠 전부터 민가에서는 각기 등대를 세우고 위쪽은 꿩꼬리로 장식을 하고 채색 비단으로 기를
만들어 단다. 작은 집에서는 깃대 꼭대기에 대개 노송을 붙들어 맨다. 그리고 각 집안에서는 집안
자녀들의 수대로 등을 매달고 그 밝은 것을 길하게 여긴다. 이러다가 9일에 가서야 꺼진다. 사치를
부리는 사람은 큰 대나무 수십 개를 이어 매고 오강(서울 근처에 긴요한 나루가 있던 다섯 군데의
강)의 돛대를 실어다가 받침대를 만들어 놓는다. 혹은 일월권(등대 꼭대기의 장식)을 매달아 빙빙
도는 것이 마치 연달아 나가는 총알 같다. 혹 종이로 화약을 싸서 줄에다 매어 위로 솟구치게 하면
활을 떠난 화살 같아 화각(아래로 내려오는 불길)이 흩어져 내려오는 것이 마치 비가 오는 것 같다.
혹은 종이를 수십 발이나 되게 이어 붙여 펄펄 날리면서 마치 용의 모양과 같다. 혹 광주리를 매달
기도 하고, 혹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옷을 입혀 줄에 붙들어 매어 놀리기도 한다.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가게에서는 등대를 높이 세우느라고 받침대를 다투어 높이 만들고 수십 개의 줄을 펼쳐 놓고
'어기어차' 세워 올린다. 여기에 기묘하고 수많은 등불을 매달아서 문자 그대로 불야성을 이루게
되면, 그 사이로 구경꾼들이 떼지어 밤새도록 거닐기도 하고, 이이들은 제각기 등밑에 자리를 잡고
시루떡 등을 먹으며 즐겼다.
등은 재료에 따라 종이등,베등,나무등,돌등 등으로 다양하게 나눌 수 있는데 연등행사에 쓰인 등은
지등이다. 초파일 연등놀이에 쓰인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등만도 50여 종이니 얼마나 성했는지 알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시내에서 파는 등은 천태만상으로 오색이 찬란하고 값이 비싸며 기여함을
자랑하였다"고 하였으며, <열양세시기>에도 "모양이 가지각색이어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종로에는 이 등을 보려고 사람들이 담벼락같이 늘어선다고 하였다. 장안 밖의 시골 노파들은 서로 붙들
고 다투어 와서 남산의 서쪽 봉우리인 잠두봉에 올라가 이 장관을 구경했다.
등에는 편편한 면과 모가 진 곳마다 삼색의 돌돌 만 종이나 길쭉한 쪽지를 붙이기도 하여 바람에 펄럭일 때의 모양이 매우 멋이있다. 채색에 있어서도 주로 수복(壽福),희(囍)자의 글자와 화조,사군자 등을 아름답게 그려 채색하였다. 북처럼 생긴 북등에는 장군이 말을 탄 모양이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인물들을 그렸다. 연등에는 종이를 발라 말 타고 사냥하는 모습이나 매, 개, 사슴, 꿩, 토끼 모양을 그려서 등 안의 선기(갈이틀)에붙이면 바람에 의해 등이 돌 때 비쳐나오는 그림을 보게 했다. 중국 송나라 어느 시인은 이 광경을 일러 말하기를 "그림자가 회전하니 탄 말이 종횡으로 달리는 구나"하여 이를 역마등 혹은 주마등이라 하였다.
인도 가난한 여인의 등불
현우경 빈녀난타품을 보면 부처님이 영취산에 계실 때의 일로 밤이 깊어 다른 등들은 다 꺼졌으나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지극한 서원과 정성으로 밝힌 등불만이 밤이 깊어도 끝까지 밝게 빛나고 있었고 이것을 본 부처님께서 "이 여인은 등불공양의 공덕으로 성불할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어 부처님 당시부터 등공양 풍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등은 우리 모두의 소망을 담고 있으며 그로 인해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희망의 빛이 되어 닫혀 있는 모든 이의 마음 문도 열려지길,
그리하여 어렵고 힘든 세상 길 힘차게 걸어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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