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산나물 / 노천명

시인묵객 2019. 5. 24. 08:00

 

 

 

산나물/노천명

 

​먼지가 많은 큰 길을 피해 골목으로 든다는 것이 걷다 보니

부평동(富平洞) 장거리로 들어섰다. ​

유달리 끈기 있게 달려드는 여기 장사꾼(아주마시)들이 으레,

또 “콩나물 좀 사 보이소 예, 아주머니요, 깨소금 좀 팔아 주이소” 하고

잡아 다닐 것이 뻔한 지라 나는 장사꾼들을 피해 빨리빨리 달아나듯이 걷고 있었다. ​

그러나 내 눈은 역시 길가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한 군데에 이르자 내 눈이 어떤 아주머니 보자기 위에 가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

그 보자기에는 산나물이 쌓여 있었다.

순진한 시골 처녀 모양의 산나물이 콩나물이며 두부,

시금치 들 틈에서 수줍은 듯이 그러나 싱싱하게 쌓여 있는 것이었다. ​

얼른 엄방지고 먹음직스러운 접중화가 눈에 들어온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산나물들도 낯이 익다. ​

고향 사람을 만날 때처럼 반갑다.

원추리며 접중화는 산소의 언저리에 많이 나는 법이겠다.

봄이 되면 할미꽃이 제일 먼저 피는데

이것도 또한 웬일인지 무덤들 옆에서 많이 핀다. ​

바구니를 가지고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가던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일이다.

예쁜이, 섭섭이, 확실이, 넷째는 모두 다 내 나물 동무들이었다. ​

활나물, 고사리 같은 것은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만 꺾을 수가 있다.

뱀이 무섭다고 하는 나한테 섭섭이는

부지런히 칡 순을 꺾어서 내 머리에다 갈아 꽂아주며,

이것을 꽂고 다니면 뱀이 못 달려든다는 것이었다. ​

산나물을 캐러 가서는 산나물만을 찾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산 저 산으로 뛰어다니며

뻐꾹채를 꺾고 싱아를 캐고 심지어는 칡뿌리도 캐는 것이었다.

칡뿌리를 캐서 그 자리에서 먹는 맛이란 또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꿩이 푸드덕 날면 깜짝들 놀라곤 하는 것이었다. ​

내가 산나물을 뜯던 그 그리운 고향엔 언제나 가게 될 것인지? 고향을 떠난 지 30년.

나는 늘 내 기억에 남은 고향이 그립고 오늘처럼 이런 산나물을 대하는 날은

고향 냄새가 물큰 내 마음을 찔러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놓는다. ​

산나물이 이렇게 날 양이면 봄은 벌써 제법 무르익었다.

냉이니 소루쟁이니 달래는 그리고 보면 한물 꺾인 때다. ​

산나물을 보는 순간 나는 그것을 사고 싶어 나물을 가진 아주머니 앞으로 와락 다가서다가

그만 또 슬며시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각을 해 보니 산나물을 맛있는 고추장에다 참기름을 쳐 무쳐야만,

그래서 거기다 밥을 비벼서 먹어야만 맛이 있는 것인데 내 집에는 고추장이 없다.

그야 아는 친구 집에서 한 보시기쯤 얻어올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고추장을 얻어서 나물을 무쳐서야 그게 무슨 맛이 나랴.

나는 역시 싱겁게 물러서는 수밖엔 없었다. ​진달래도 아직 꺾어보지 못한 채

봄은 완연히 왔는데 내 마음 속 골짜구니에는 아직도 얼음이 안 녹았다.

그래서 내 심경은 여태껏 춥고 방 안에서

밖엘 나가고 싶지가 않은 상태에서 모두가 을씨년스럽다.

​시골 두메 촌에서 어머니를 따라 달구지를 타고 이삿짐을 실리고

서울로 올라오던 그때부터 나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내쫓긴 것이다.

그리고 칡순을 머리에다 안 꽂고 다닌 탓인가,

뱀은 내게 달려들어 숱한 나쁜 지혜를 넣어주었다. ​

10여 년 전 같으면 고사포(高射砲)를 들이댔을 미운 사람을 보고도

이제는 곧잘 웃고 흔연스럽게 대해 줄 때가 있어,

내가 그 순간을 지내놓고는 아찔해지거니와

풍우난설(風雨亂雪)의 세월과 함께 내게도 꽤 때가 앉았다. ​

심산(深山) 속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연의 품에서 퍼질 대로 퍼지다

자랄 대로 자란 싱싱하고 향기로운 이 산나물 같은 맛이 사람에게도 있는 법이건만

좀체 순수한 이 산나물 같은 사람을 만나기란 요즈음 세상엔 힘 드는 노릇 같다.

산나물 같은 사람은 어디 없을까?

모두가 억세고 꾸부러지고 벌레가 먹고 어떤 자는 가시까지 돋혀 있다.

어디 산나물 같은 사람은 없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