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미인도를 닮은 시 / 허 혜 정
시인묵객
2015. 11. 9. 08:00
미인도를 닮은 시 / 허 혜정
어디 옛 미인만 그렇겠는가
당신들은 내 문턱을 호기로 밟았다고 하지만
한 서린 소리를 즐기던 가야금이 그대들을 위함이라 믿지만
복건을 쓴 유학자든 각대를 띤 벼슬아치든 내로라하는 호걸이든
나의 궁상각치우를 고르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죽어도 당신들은 한 푼 얹어주었기에
내 살림이 목화솜마냥 확 피어올랐다고 믿지만
풀 같은 데 엮어놓은 가볍고 얇은 거미집은
왕후장상을 부러워하는 법이 없다
당신들은 대대손손 선연한 낙관을 자랑하지만
붉은 공단치마를 활짝 벗어 화초도를 치고
흠뻑 먹물을 적셔 제 흥만 따라가던 족제비털 붓은
당신들의 필법을 배우려 한 적이 없다
모든 나들이를 취소하고 빗장을 걸어 잠그는 시간
학이든 호랑이든 아닌 건 아닌 게지 되돌려 보낸 서찰
혈통과 내력을 캐묻던 그대들이 나는 궁금하지 않다
천생 귀머거리 각시처럼 고개 갸웃거리다
아는 체하는 순간 기가 막히는 듯 웃는 나는
길섶에서 눈 맞춤한 눈부신 하늘, 코끝을 스치는 바람보다
당신들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곰방대를 물고 대청마루에 누워 바라보면
옥졸의 방망이도 능라의 방석도 소매 넓은 장삼도
구천 하늘 온통 희게 떠도는 춤사위일 뿐인데
팔도유람이 어찌 그대들만의 것인가
서늘한 흙무덤이 두 눈을 덮기 전에
죽음에 시치미를 떼고 멀리 나가 노는 아이처럼
곰팡이가 퍼렇게 슨 족자 속에 표구되어서도
나는 누구의 계집이었던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