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빈들에 서서

시인묵객 2011. 8. 9. 16:00

 

 

 

 

 

 

 

 

 

 

 

빈들에 서서   /    이 서 린

 

 

 

 

 

나는 이제 갈란다

 

꽁지 빠진 깃털 너덜거리는 날개 짓 푸드득

 

빈 들 힘껏 날아 오를란다

 

벼 벤 그루터기 그 지난 상처 같은 너른 논

 

돌고 돌아 하늘 높이 오를란다

 

 

늙은 나무 묵직한 허리께 지나 긴긴밤 지새도록

 

못 다한 이야기 오래된 정자나무 둥치 아래 지나서

 

묵묵히 묵묵히 빈들 건너 갈란다

 

 

겨울 초 푸릇푸릇 남은 밭 귀퉁이

 

마른풀 촘촘한 들판 가운데 앉았다가

 

우우우 달려오는 바람소리

 

듣다가 천천히 들길 따라 갈란다

 

 

물 좋고 정자 좋은 생이 어디 있더냐

 

저 들 넘어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

 

지나온 길 돌아보며 굽이굽이 생각하고

 

이어지는 빈들처럼 마음 환히 비우고

 

바람에 서걱이는 풀잎 따라 가 볼란다

 

 

 

 

 

이 마음 닦아주는 여기 이 자리에 처음과

 

마지막 다시 생각하면서 눈감고

 

온 몸으로 바람소리 듣다가

 

꽁꽁 언 땅 가르며 먼 길 떠날 새들처럼

 

조용하고 힘차게

 

이제 나는 갈란다